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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묵조선 입문 좌선의 입장 4.삼매와 무념무상 [주체적인 자각]

불교사랑

by 적산 2011. 12. 1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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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선이란 드야나 라는 범어를 번역한 선나의 약칭으로서 정려.정정.정사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올바른 좌선방법으로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여 산란심을 멈추고 바르게 사유하는 것이다.이것을 장려 혹은 정사유라 한다고 해서 단지 조용하게 사색과 명상에 잠긴다든가 구리추론 한다는 뜻이 아니다.뒤바뀐 사려분별을 접어두고 추리추론을 떠나 잡다한 상념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것이다.선정이라든가 삼매라는 것은 결코 흔히들 말하는 무념무상의 의미 곧 멍한 정신의 공백상태라든가 일종의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그와는 달리 무념무상이란 수식삼매가 수식의 일념만이 생생하게 작용하여 그것이 끊임없이 일관되게 상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이 성성적적하게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선이란 정좌하여 무념무상의 경지가 되는 것 이라는 사고방식이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유명한 사상가나 문하가들마저도 예외는 아니다.마치 선에 대하여 분명하게 확신이라도 하고 있듯이 무념무상의 경지라고 자신 있게 표현하기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본래 무념무상이라는 것은 심중에 한 점의 잡념도 없이 한 가닥의 망상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온 정신의 활동이 완전히 멈추어 버려 멍멍한 공백상태와 같다든가,일종의 활홀한 망아지경과 같은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다.참으로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이해이다.선정이라든가 삼매라는 것은 결코 그와 같은 의미의 무념 무상의 경지가 아니다.예로부터 이와 같은 의미의 무념 무상의 경지가 아니다.예로부터 이와 같은 의미의 무념 무상의 경지를 깨침의 극칙이라 간주하여 그 활홀지경에 빠져 있으면서 겨우 호흡만 유지되고 있어 마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의 경지를 가리켜 유기사인이라 하여 경계하였다.곧 이처럼 잘못된 선을 암증선 내지 사인선이라 불렀다.그것은 사선이지 좌선이 아니다.삼매라는 것은 소위 그런 의미의 무념무상이 아니다.무념무상은 잡념 내지 망념이 없고 잡상 내지 망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그렇다면 잡념내지 망념이 없는 진정한 무념무상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곧 정념이 상태이다. 나아가서 잡념 내지 망념이 일지 않고 본래청저심 내지 자성청정심이 유지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산란심과 혼침이 없어 일관되게 대상과 자신이 구별없이 유지되는 경지이다. 이것을 삼매현전이라 한다.그래서 무념무상은 공 삼매현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무념무상은 반드시 삼매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중요한 것은 자신이 삼매에 들어가든 무념무상이 되는간에 지금의 그 자신이 처해 있는 경지를 확실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자신이 지금 화두를 들고 있으면 화두를 들고 있는 줄을 알고 사물의 속성을 관찰하고 있으면 관찰하고 있는 줄 알며 만물의 실상을 터득하고 있으면 터득할 줄 알고 깨침을 얻었으면 자신은 깨침을 얻었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이것을 지견이라 한다.선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지견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올바른 깨침을 지향한다. 가령 사과 맛이 달콤하고 새콤하며 싱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야 어떤 상황속에서 직접 사과 맛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곧 사과인 줄을 알아차리게 된다.사과 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설령 지금 사과를 먹고 있다 해도 그것이 사과인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이처럼 어떤 경지를 경험할 때 그 경지가 어떤 것이고 어떤 단계이며 거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지견이 없어서는 안된다.그 지견을 잊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삼매이다. 삼매속에서는 모든 것이 투명한 물처럼 분명히 보인다.그리고 고요하며서도 생생하게 깨어 있다.그러나 무념무상의 경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자신이 어느 곳에 서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나아가서 어느 대상에 몰입해 있을 경우는 시간을 잊고 공간을 잊으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긴다.그래서 그것을 깨침의 경허으로 잘못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모든 번거로운 상념이 잠시 멈추어 있을 뿐이다.그것을 초월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다시 비집고 겉으로 드러난다.마치 흙탕물을 고요하게 가라앉힌 경우와 같다. 그러다가 다시 물이 출렁거리면 금새 흙탕물로 변해 버린다.참으로 진정한 의미의 무념 무상을 통한 삼매의 경우가 되려면 고요한 상태에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흙까지도 말끔하게 걷어내어 다시는 물이 출렁거려도 흘탕물로 변하지 않는 주도면밀하고 용의주도 하고 행지면밀한 경험이 없어서는 안된다.따라서 삼매의 의미와 무념무상에서 말하는 그 본래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삼매라는 것은 범어의 삼마디를 한자로 음사하여 삼마지라 하였다. 이것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여념이 없는 것 일심불란 하게 사물을 대하는것 의 뜻이다.그러나 이것으로 삼매의 의미가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삼매라는 말에는 심경일여하고 물아불이한 것.정수하여 불수한것. 정념이 일관되게 상속되는 것 등 세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가지 작용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 곧 삼매이다.심경일여 하고 몰아불이한 것은 관찰대상의 객체와 관찰하는 주체간에 구분이 없는 경지이다.올곧은 좌선으로 말미암아 호흡하고 있는 자신과 호흡이 없어진 상태 그리고 똑바르게 앉아 있는 자신과 앉아 있다는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곧 호흡삼매이고 좌선삼매이다.앉아서 호흡을 하고 좌선을 하지만 호흡이 앉아 있고 좌선이 호흡을 하는 것이다.이찍이 동산양개는 이것을 가르켜 귀로 색을 보고 눈으로 소리를 듣는 경지라 표현하였다. 그리고 감각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느낄 분이지 더 이상 이러쿵 저러쿵 그것으로 인하여 제3의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상태 이것이 곧 정수하여 불수한것이다. 정수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왜곡됨이 없이 잇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 인식하는것이다.그리고는 그것으로 유지되면서 달리 그 정수로 인하여 분별의식을 받아들이거나 일으키지 않는 상태 이것이 불수이다.이것을 감각탈락이라 한다.다시 말해 지배되지 않으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감각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움이다.감각에 얽매이면 그것은 삼매가 아니다.단순한 정신통일에 불과하다.정신통일에서는 하나의 감각에 몰입하여 다른 것을 염두에 주디 않는다는 의미이다.그러나 삼매는 여타의 잡념이나 망념이 없는 상태 곧 여념을 두지 않으면서도 멍멍하거나 활홀한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어디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할작용이다. 이것이 삼매가 단순한 정신통일과 크게 다른 구분되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상태가 여일하게 지속되는 것이 곧 일관되게 상속되는 것 이다. 어느 경지나 순간의 경험은 쉽게 일어난다.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유지된다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니다.이것을 수식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호흡을 길게 내쉬고 들이키면서 하~아~나 하른 수를 세고 다시 길게 내시고 들이키면서 두~우~울 이라는 수를 세며 호흡을 길게 내쉬고 들이키면서 세~에~엣 하고 수를 세어 나간다.그러다가 잡념이 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열까지 헤아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적어도 그렇게 수식관을 통하여 열까지 유지시킬 수가 있다는 그것은 적어도 5분 이상을 지속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5분 동안 잡념이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 서는 것을 말한다.처음 5분 동안 유지하기가 힘들지 5분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그 다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옛날 원나라 때 고봉원묘는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삼매에 들어야 하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다음과 같이 살펴야 한다.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연못에 던지면 곧장밑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이렇게 하여 7일이 지나도록 깨치지 못하면 내 목을 잘라 가거라.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도 이처럼 간절하게 드는 것이 필요하다.간절하게 화두를 든다는 것은 그 지속성을 말한다.삼매의 순간이 곧 영원으로 통하는 영원한 현재의 경험이 중요하다.이것은 일관되게 지속되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 지속성이라는 것은 순간을 영원처럼 유지하고 하나를 전체처럼 간주하는 시간적인 공간적인 상속이다.나와 남의 분별이 개입되고 나면 지속성은 사라지고 만다. 내가 곧 관찰의 대상이 되고 관찰의 대상이 곧 내가 되는 심경일여와 몰아불이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관되게 상속하는 것의 경험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무념무상과 삼매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삼매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통해 체험된다.그리고 무념무상은 삼매를 통해 그 마음의 상태를 점검받는다.좌선을 통한 심일경성의 삼매와 텔레비젼이나 독서를 통한 무념무상의 상태가 같은 것이 아니다.양자가 몰입이라는 입장에서는 같을지 몰라도 삼매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나아가는 것인 만면 텔레비젼이나 독서를 통한 무념무상의 상태는 외부의 대상에 자신의 마음이 끌려가는 객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주체가 되어 있는 좌선의 삼매는 언제라도 어떻게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시간만큼 유지시킬 수가 있다.그러나 외부대상에 마음이 끌려 몰입해 있는 경우은 그 대상이 펼쳐져 나아가는대로 자신이 끌려갈 수밖에는 없다.텔레비젼의 프로가 끝나고 독서의 내용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이상 그 무념무상은 지속되지 않는다.그리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내용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대상에 마음이 동의하고 있을 뿐이다.이런 점에 있어서 삼매는 자유로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상이다.어디까지나 자신이 주인이다.그라나 주인이라는 상이 없다.주객을 잊었지만 자신이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출처 : 불교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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