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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이 술 마시는날

나의 이야기

by 적산 2012. 7. 13.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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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과 통합을 위한 궁중 연향

『경국대전』은 조선시대 국가통치의 기본법전으로 지금의 헌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 『경국대전』은 하늘과 땅 그리고 춘하추동의 운행질서를 본떠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 예의와 관련된 예전禮典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과 같다고 하여 춘관春官이라고도 하였다. 만물이 소생하는 우리나라의 봄을 한번 상상해보라. 한겨울의 추위로 꽁꽁 언 대지 위로 훈훈한 남풍이 불어온다. 대지의 얼음이 풀리면서 생명들이 깨어난다. 갖가지의 풀과 꽃 그리고 나무들이 싹을 돋우고 꽃을 피운다. 저마다의 모습과 특징을 가진 온갖 생명들은 이 땅을 금수강산으로 수놓는다. 이런 봄을 보면서 옛 사람들은 예악禮樂을 생각했다. 크고 작은 풀과 나무들에서는 마치 사회적 신분이 다른 양반, 중인, 양인, 노비들을 연상했다. 또한 서로 다른 생명들이 공존하며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연출하는 광경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적 신분들이 화합하여 대동 사회를 이루는 모습을 꿈꿨다. 조선왕조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예의 핵심을 ‘질서’라고 정의했다. 예컨대 ‘조정은 존엄을 위주로 하기에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으며, 임금은 명령하고 신하는 시행한다.’고 갈파했던 것이다. 마치 봄에 피어나는 서로 다른 풀과 꽃들이 서로 다른 존재이듯, 예에 의해 질서 지워지는 사회 신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의 근본적인 기능은 구별하고 차별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런 예만 있다면 사회는 신분 간의 구별과 차별로 찢어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다. 예에 의한 구별과 차별을 넘어 화합과 통합을 이루어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옛 사람들은 바로 연향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과 신하는 엄숙하고 공경함을 위주로 한다. 하지만 오직 엄숙하고 공경하기만 하면 형세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어 실정이 통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선왕이 연향의 예를 만들었다. 친할 경우에는 손님과 주인이라 하였고, 존경할 경우에는 제부(諸父-천자의 동성 제후) 또는 제구(諸舅-천자의 동성 대부)라고 하였다. 연향에서는 먹고 마실 것을 풍성하게 하여 은근한 뜻을 보이면서 가르침을 희망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어느 날 종과 북을 설치하여 연향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이 나를 어여삐 여겨 나에게 큰 가르침을 보여준다.’ 하였으니, 이 노래가 바로 선왕이 제정한 연향의 예이다.”

(정도전, 『조선경국전』예전, 연향)


연향의 종류와 특징

연향이란 연宴과 향享의 합성어이다. 연은 음악이란 뜻이고 향은 드린다는 뜻이다. 즉 연향이란 음악과 음식, 술 등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함께 즐기는 잔치란 뜻이다. 조선시대의 궁중 연향은 기본적으로 왕과 다양한 신분층의 사람들이 만나 음악과 음식, 술을 함께 즐기는 궁중 잔치였다. 『경국대전』예전의 연향 조항에는 7가지의 연향이 규정되었다. 첫째는 왕과 조정 관료들이 명절 등에 치르는 진연進宴이었다. 그 외에 왕과 공신들이 춘하추동에 한 번씩 치르는 진연, 왕과 왕의 친인척이 일 년에 두 번씩 치르는 진연, 왕과 원종공신들이 일 년에 한차례 치르는 진연이 있었다. 또한 매년 정월 초하루와 동지에 왕과 문무백관들이 치르는 회례연會禮宴과 매년 늦가을에 왕과 노인들이 모여 치르는 양로연이 있었으며 왕 그리고 지방 또는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이 치르는 연향이 있었다. 아울러 외국의 사신이 올 경우에 왕과 외국 사신이 치르는 연향과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어른들의 생일이나 환갑 또는 질병치료 등을 기념하기 위한 연향이 또 있었다. 이 같은 궁중 연향은 왕과 남성들이 참여하는 외진연과 왕과 여성들이 참여하는 내진연으로 구분되었다. 궁중 연향의 구체적인 진행 방법과 절차는 『국조오례의』에 자세히 규정되었으며, 연향 결과는 『진연의궤』, 『진찬의궤』, 『영접도감의궤』 등으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궁중 연향에서는 최고의 음악과 춤 그리고 음식과 술이 차려졌다. 음악은 장악원의 남성 음악인들이 연주하였으며 춤은 장악원의 기생들이 추었다. 음식과 술은 궁중의 전문요리사들이 준비했다. 조선시대 궁중 연향에서 절정은 신하들이 왕에게 술을 올리는 절차였다. 궁중 연향에서는 청주, 소주, 향온주 등이 사용되었는데, 왕은 주로 향온주를 마셨다. 향온주는 소주의 일종으로 녹두향이 은은히 풍기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정월 초하루에 치러지는 회례연의 경우, 첫 잔은 왕세자가 올렸는데, 잔을 올릴 때 ‘왕세자 신 아무개는 정월 초하루를 맞아 크게 경사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삼가 천천세수千千歲壽를 올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영의정 등이 차례로 술잔을 올려 왕은 총 아홉 잔을 마셨다. 왕이 술을 마실 때마다 장악원의 남성 음악인들은 음악을 연주하였고 기생들은 춤을 추었다. 그런데 궁중 연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은 연향 후에 백성들과도 연향의 즐거움을 함께 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거행했다. 쌀을 내려주는 행사, 죄인들을 사면하는 행사, 세금을 탕감해주는 행사 또는 윤음綸音을 발표하는 행사 등이 그것이었다. 예컨대 정월 초하루의 회례연이 끝나면 왕은 곧바로 윤음을 발표했다. 이 윤음은 전국의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며 죄인들을 사면하는 글이기에 권농윤음이라고도 하였다. 윤綸이란 실로 꼰 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윤음이란 실로 꼰 줄과 같은 소리라는 의미이다. 왕이 전국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글은 몇 글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궁궐에서 반포된 윤음은 전국의 지방 관리들에 의해 백성들에게 다시 선포된다. 윤음을 들은 백성들은 서로서로 그것에 대해 의논하고 평가한다. 그 과정이 마치 실 뭉치에서 실을 뽑아내고 그 실을 꼬아 줄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해서 윤음이라고 하였다. 실로 꼰 줄이 튼튼하게 제 역할을 하려면 실이 좋아야 하고 실이 좋으려면 실 뭉치 자체가 좋아야 한다. 윤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음을 반포하는 왕이 진정으로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려할 때, 온 나라 사람들은 하나로 화합될 수도 있었고 통합될 수도 있었다.



조선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했던 궁중 연향

인조반정 이전까지 궁중 연향에서는 왕과 양반관료들이 참여하는 외진연에 장악원의 기생들이 참여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장악원 기생의 존재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전의 궁중 연향을 화려하고 흥겹게 해준 주역이 바로 장악원의 기생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왕위에 오른 후 장악원의 기생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윤리에 비추어볼 때, 왕과 양반관료들이 참여하는 외진연에 장악원 기생이 참여하는 것은 유교윤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악원 기생이 폐지되면서 왕과 양반관료들이 참여하는 연향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사람들은 장악원 기생이 아니라 무동舞童과 가동歌童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외진연은 장악원 기생이 빠지게 됨으로써 이전에 비해 화려함과 즐거움이 많이 약화되었다. 대한제국의 성립과 멸망 역시 궁중 연향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교사상에 의하면 악樂이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노래에 춤까지 더해져야 진정한 악이 될 수 있었다. 유교에서 악은 가수와 악대, 무용대가 어울리고 거기에 가락, 가사, 율동이 어울린 종합예술이었던 것이다. 이 악은 궁극적으로 예와 함께 하기에 통칭 예악이라 불리곤 했다. 따라서 예가 바뀌면 당연히 악도 그에 걸맞게 바뀌었다. 이런 사실은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조선시대에 제후 체제에 맞추어 만들어졌던 예와 악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황제국 체제에 어울리는 예와 악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황제국 체제에 적합한 악이란 황제의 예법에 어울리는 웅장한 가락, 가사, 율동, 악대, 무용대를 뜻했다. 대한제국기의 궁중 연향에서는 황제의 예와 악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식민지가 되면서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되었다. 그에 따라 궁중 연향 역시 식민지 치하의 이왕가에 맞게 대폭 약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궁중 연향은 조선의 역사와 그 운명을 함께했다고 하겠다.

 

출처 : 구미문화지킴이(문화탐방단./ 옛.생활문화연구소)
글쓴이 : 청산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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