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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茶문화의 역사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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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산 2012. 7. 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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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문화(茶文化)의 역사와 사상

1) 역사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2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속에서 우리의 차문화는 생활속에 깊숙히 뿌리를 내려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다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우리선조들은 차(茶)를 신성하고 성스런 것으로 여겨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이나, 조상님들 제전에는 꼭 올리는 제수로 삼았다. 그 의식이 성스러우면 더욱 차는 빼놓을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명절에 꼭 차례(茶禮)를 올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차문화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부터 비록되어, 산천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와 차례상에 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 시대에는 백두산에서 나는 백산차(白山茶)를 사용하였다.
이 백산차는 백두산 주변과 고산지대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철쭉과에 속한다. 봄철이면 연록색의 엷은 잎이 피는데, 이 때 이파리를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신다. 이 백산차를 마신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이 지역 주면들은 지금도 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이 차는 동이족(東夷族) 의 고야차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나무로 만들은 차(茶)를 마시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백산차는 밀려나고 그 자리를 중국 녹차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독자적인 차생활을 창조해가며 차문화는 계승 되었다.

1) 삼국의 차
삼국시대에 주로 차생활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왕과 왕족들 그리고 사대부의 귀족들과 사원의 고승들, 선랑 또는 화랑들이다.
왕족들은 궁궐안으로 차를 끌어들여 차생활을 하였으며 속님 접대와 예물로 차를 사용하였다. 더욱이 고승들에게 예물을 보낼때는 차와 향을 보내었다.
귀족들 역시 차생활을 즐겼으며 손님 접대에는 최고의 대접으로 차를 내 놓았다. 그리고 사원의 승려들은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데 사용하였고, 여가에 즐겨 마시는 기호품으로 삼았다.
선랑(仙郞) 또는 화랑(花郞)들은 심산유곡을 찾아 심신수련을 할 때 차를 마시며 하였다. 차는 이와같이 훌륭한 예물도 되고 심신 수행의 도반도 되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는 멋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이미 삼국시대에 그 정신적 배경이 정립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헌안왕(憲安王)이 수철화상(秀澈和尙)의 제사에 올리도록 차와 향을 보낸 것이 효시가 되어 제사에 차 올리는 풍속이 생겨나게 된 것이며, 충담선사(忠談禪師)가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올린 차가 헌다의식(獻茶儀式)의 시원이 되었으며, 사선랑(四仙郞:영랑, 술랑, 남랑, 인상) 이 강릉 경포대, 한송정(寒松亭) 등지에서 차 생활을 하면서 심신 수행을 하였으며, 설총, 최치원 등 선비들은 차를 호연지기를 기르며, 정신을 맑히는 음료로 활용 하였다.
이와 같은 차 문화는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2) 고려의 차
고려의 차문화는 네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왕실차, 귀족차, 사원차, 서민차가 그것이다.

왕실차는 궁중에서 거행하는 차로서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두고 왕과 왕비, 태자와 공주 등 왕족들의 차 생활을 돕고, 국가의 중요한 진다의식(進茶儀式) 때에 차를 올리는 의식을 집행하였다.
고려 때는 사례(四禮:길례, 흉례, 빈례, 가례)를 지냈는데 이 때에 모두 차를 올리는 진다의식을 봉행 하였다. 공이 많은 신하들이 죽으면 부의품으로 많은 차를 하사하기도 하고 외국에 공물로 보내기도 하며, 왕과 왕비 등의 책봉식(冊封式)과 공주를 시집보낼 때 외국사신을 접대 할 때,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치를 때 모두 진다의식을 했다.
이처럼 왕실차는 지극히 의식적이고 의례적이어서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였다. 왕이나 왕세자가 차를 마실 때에는 진악(進樂)까지 따랐으니 그 장엄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한 궁중에 양이정(養怡亭)이나 모정(茅亭)같은 다정(茶亭)을 지어놓고 많은 시신들을 불러 모아서 다회(茶會)나 시회(詩會)를 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의례음다법(儀禮飮茶法)이 생겨난 것이다.

귀족차(貴族茶)는 나라의 원로나 지방관등 사대부들이 즐기던 차 생활을 말한다. 귀빈 접대를 할 때나, 한가하게 다회를 할 때 하는 음다법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원로들이 모여 만든 강좌칠현(江左七賢)이나, 기로회(耆老會)가 대표적인 차의 모임이다. 이들은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가무(歌舞) 시주(詩酒) 끽다(喫茶)로 풍류(風流)놀이를 하였다.
여기에서 풍류음다법(風流飮茶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시(茶時)는 이로부터 발달되었다.

사원차(寺院茶)는 사원의 승려들이 부처님께 헌다(獻茶)하거나, 여가에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말한다.
사원에서는 매일 조석으로 삼시때 불전에 차공양을 올린다. 그리고 공덕제(功德祭)가 있으면 임금이 직접 차를 달여 불전에 올렸다. 뿐만 아니라 조사스님들 제전에도 차공양을 올리며, 공양을 마치고 나면 차 마시는 시간이 있고, 참선수행을 하다가 쉴 때에도 졸음을 쫓는 차를 마신다. 또는 손님을 대접할 때는 술 대신 차를 내 놓았다. 이처럼 사원에서는 매일 차를 마셨으며 특히 선승(禪僧)들은 참선하는 중에 차를 즐겼다. 차의 삼매(三昧)에 빠지곤 했는데 여기에서 삼매음다법(三昧飮茶法)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마시는 차를 충당하기 위해서 사찰 입구에 다촌(茶村)이라는 마을을 두고 차를 만들어 사원에 물과 함께 바치게 하였다.

서민차(庶民茶)는 일반 서민들이 차세금(茶稅)을 징수하고 난 다음 끝물을 채취해서 약용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감기, 몸살, 두통이 생기면 약탕관에 차와 물을 넣고 끓인다. 이 때 생강이나 파를 넣고 함께 끓이면 좋은 약차가 된다. 이것을 마시면 감기 몸살이 씻은 듯이 낫는다. 이로 말미암아 약용음다법(藥用飮茶法)이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 생겨난 다세(茶稅) 제도는 매우 혹독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지리산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관청의 독촉에 못 이겨 잔설이 쌓여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 맹수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차잎을 채취해서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개경(開京)까지 가져다 바쳤다. 이렇게 초봄부터 여름까지 하니 농사철을 놓치고 폐농 하기가 일쑤였다. 이 폐단이 차를 산업화하지 못하게 한 큰 원인이 되었다.

고려의 茶人들을 차도구를 화려하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래서 고려청자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금화오잔(金花烏盞), 비색소구(秘色小) 등의 찻잔은 절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선승들은 찻잔을 직접 생산하기도 했는데, 계룡산 갑사(岬寺)와 동학사(東鶴寺) 가 대표적이다. 이 찻잔 속에는 선적(禪的)인 무(無)와 공(空)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다.
고려인들이 즐겨 마신 차는 뇌원다(腦原茶)와 대다(大茶)를 꼽을 수가 있다. 뇌원다는 떡차이고 대다는 잎차이다. 이외로 유다(孺茶), 자순차(紫筍茶), 영아차(靈芽茶)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인들은 차를 선물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차 선물을 받으면 으레히 시(詩)로서 답례를 해야하만 한다. 풍류의 멋이 있는 사람은 십여 편씩의 시를 지었다. 이러한 고려의 다풍(茶風)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3) 조선의 차
조선의 차문화는 전기는 고려의 다풍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중기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2백년간 공백기를 거치게 된다. 그 후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艸衣禪師)와 다산(茶山) 정약용, 추사(秋史) 김정희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차문화 중흥이 계기가 되어 후기에는 다시 차문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또다시 우리의 차문화는 빚을 잃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은 산 속으로 은거하고, 선승들마저 배불숭유 정책에 밀려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간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산 속에 은거한 선비들과 선승들에 의해 계승된 차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관인으로 남아 차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관인문화와 은둔 문화로 나뉘게 된다 이것을 관인차와 은둔차라고 한다.
관인차는 다시(茶時)제도를 만들어 내어 하루에 한차례씩 모여 차를 마시면서 정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관원들이 부정한 관리를 발견하면 탄핵할 때 밤에 다시를 했다. 이것을 야다시(夜茶時)라고 한다. 이 때 차를 끓여 주는 일을 담당한 사람을 다모(茶母)라고 한다. 임금의 차 시중을 드는 사람은 상다(尙茶)라고 하고 고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색(茶色)이라 하고 하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모(茶母)가 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영조(英祖)는 왕명을 내려 차 대신 술(酒)이나 끓인 물로서 대신하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때나 명절 때에 차 대신 술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차문화는 쇠퇴를 했지만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궁중에는 궁중의 법도에 맞는 다례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궁중다례라고 한다. 그 의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은 관혼상제를 모두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거하여 다례를 지냈으며, 사원에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운수단(雲水壇)과 백파선사(白坡禪師)의 구감(龜鑑)에 근거하여 다례를 지내었다. 이처럼 의식만 남고 문화는 쇠퇴한 상태로 계승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고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으며, 다산은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여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을 만들어 차문화 중흥을 도모하였다. 추사는 다시(茶詩)를 지어 당시에 옛 풍류를 진작 시켰다. 이 때부터 다시(茶詩)를 지어 당시에 옛 풍류를 진작 시켰다. 이 때부터 다시(茶詩)가 많이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중흥의 기미를 보이던 차문화는 한일 합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다시 빛을 잃고 암흑 속에 묻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일본의 차문화를 한국에 심기 위해서 우리나라 차문화 연구와 교육에까지 손을 대 의무적으로 여학교에서 일본다도 교육을 실시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 차 문화를 거세게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차문화는 광복이 된 후에 옛 법도와 풍류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다시 부흥이 되어야만 한다. 전통 문화는 그 민족의 자존심이자 그 민족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2) 정신
차정신은 차생활을 하던 그 시대의 사상가(思想家)들이나 종교인들에 의해서 거의 완성 되었다. 우리 나라의 차정신은 차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과 철학 내지는 종교 정신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차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삼국 시대는 대부분이 승려들에 의해서 차생활이 유지되었으며 일부 귀족들과 화랑도, 그리고 선(仙)사상을 가진 선인(仙人)들과 도교의 사상가들이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족과 귀족계급의 유학자들과 선승들 사이에 유행했으며 일부 도가(道家)의 사상을 가진 은거인이 차생활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해가면서 유학자가 득세 하게 되어 관인계급에서 다례(茶禮)를 행했으며 은거인이나 처사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이어졌고 산중으로 밀려난 승려들 사이에 차 생활이 유지되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차생활은 불교의 승려들과 유교의 유생들과 도교의 도학자들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차생활을 즐기면서 자기들의 종교 사상이나 철학으로 차정신을 확립시켰으며 법도와 체계를 세워 놓았다. 사원의 승려들은 선(禪)사상에 차를 끌어들여 같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유가의 유학자들은 그들의 윤리의식에 차를 유입하여 다례의식(茶禮儀式)을 제정하였으며 도가(道家)의 사상가들은 자연과 합일하려는 신선사상(神仙思想)에 의하여 풍류(風流)의 정신세계를 완성하였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차정신 개념도(槪念圖)

그러면 다음은 사원의 승려들이 어떻게 차를 선(禪)의 경지에까지 승화시켰는가와 유교의 유학자들이 어떻게 다례의식(茶禮儀式)을 정립했는가 또 도가(道家)의 사상가들이 완성한 풍류(風流)의 시가(詩歌)와 멋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차는 선(禪)이다.
선(禪)이란 특수한 수행(修行)의 길이다. 사원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로써 진리(眞理)를 체득하고자 하는데 드는 방편의 문으로 범어(梵語)로는{dahyana}라고 하며 한역하여 선나(禪那)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禪}이라고 하는데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는 정려(靜廬) 또는 생각하여 닦는다는 사유수(思惟修) 혹은 적멸(寂滅), 한 마음의 극치(極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선(禪)인 것이다. 모두가 선(禪)이다. 그래서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모두 선(禪)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의식이 있는 곳에는 선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차가 선과 같다는 말은, 선(禪)의 삼매경(三昧境)에 들어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길과 차의 삼매에 들어 묘경(妙境)을 깨닫는 것이 한 가지라는 뜻이다(禪茶一如).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옛 고사(古事) 한 토막을 소개하겠다.

당나라 때의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778∼897)의 말씀에 {喫茶去}라는 화두(話頭)가 있다. 어느 날 조주현 관음원(觀音院)으로 수행자 두 명이 찾아왔다. 한 사람이 조주선사께 절하고 묻기를 {불법(佛法)의 대의(大義)가 무엇입니까}하였다.
조주선사께서 담담한 어조로 그 수행자(納子)에게 묻기를 {이곳에 한 번 온 일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수행자가 {한 번도 온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게나(喫茶去)}라고 했다.
또 다른 수행자가 조주선사께 절하고 묻기를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조주선사께서 절하고 묻기를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 수행자가 {예, 한 번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조주선사께서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게나}하셨다.
원주(院州) 스님이 밖에서 듣고 있다가 이상히 여겨 조주선사께 묻기를 {스님! 어째서 이곳에 한 번도 온 일이 없다고 하는 자에게도 끽다거(喫茶去)요, 한 번 온 일이 있다고 하는 자에게도 끽다거(喫茶去)입니까}하니 조주선사께서 원주스님에게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스님이 대답하니 {너도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거라}라고 했다.
온 자와 오지 않은 자, 의심하는 자 모두가 {끽다거(喫茶去)}이다. 이것은 차와 선이 한 경지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려 말기에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께서 차로써 전법(傳法)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지공선사(指空禪師)는 나옹스님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보경사(普慶寺)를 보았는가} 나옹은 대답하였다. {벌써부터 보아 왔습니다}하니 지공이 {문수와 보현보살이 거기 있던가?}하니 나옹이 {예, 잘 있습니다.}하였다. 지공이 {무슨 말을 하던가?}하고 물었다. 나옹이 답하기를 {그래, 그러면}하니 지공이 {차를 마시고 가거라(喫茶去)}라고 하였다.
그 뒤 다른 날 지공선사는 나옹스님을 방장실로 맞아들여 차를 권하고 드디어 법의(法衣) 한 벌과 불자(佛子) 하나와 법어(法語) 한 통을 주었다.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지공 방장실)의 열매는 해마다 어둡지 않은 한결같은 약이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종지(宗止)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劒)을 준다}

{百陽喫茶正安果 年年不味一通藥 東西見南北然 明宗法王千劒}

이렇게 전법계를 받고 나옹스님이 답하는 게송을 지어바쳤다.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일어나서 세 번 예배하나니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네}
{奉喫師茶了 起禮 禮三 眞消息 從古至于令』

이상과 같이 차로써 전법한 것은 특별한 예로써 禪과 茶가 진수(眞水)를 얻어 신(神)과 체(體)를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또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波羅蜜)이라고 했다. 일체법(一切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걸림이 없음으로써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建)과 영(靈)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묘경(妙景)하는 것이다.

초의선사는 이처럼 바라밀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하고, 고로 차와 선이 불이하니 모든 법이 일여(一如)하다고 했다.
이런 사상은 추사 김정희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추사는 초의선사께 {명선(茗禪)}, {선탑다연(禪榻茶烟)}, {정좌처다반향초(靜座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라는 글을 써서 보내게 되었다.
이러한 글귀들은 모두가 {禪茶一如}의 경지를 천명(闡明)한 것이다.

2) 차는 멋(風流)이다.
멋이란 인간의 사고(思考)와 언행(言行)이 이상(理想)의 경지에 이르러 품위가 있고 운치가 있어 속되지 않고 사려깊은 것을 말한다.
멋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재화를 들여 멋있게 살고 싶어 집안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고상한 취미를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사람이 맨 처음 움직이면 배고픔을 면하는 일이요, 그 다음은 안일과 행복을 찾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많은 취미생활을 만들어 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차생활이다.
이러한 차생활은 사람들의 정서생활에 많은 이로움을 주었고 또 정신영역을 한없이 넓혀주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사색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무한한 세계를 개척했고 시공(時空)을 초월한 자기 완성을 통해서 영원히 사는 비법을 터득했고 또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어 우주의 일부분으로 완전한 자유를 얻었으며 정신적 자기구현을 통해 두려움이 없는 마음의 편안을 얻은 것이다.

태초부터 청정한 이 마음에는 한 점 바람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폭풍을 맞고 서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처럼 길을 잃은 인간들이 차 한잔의 여백을 통해서 진실을 깨닫고 자기의 잃어버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 길이야말로 진정한 다인(茶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화묵객(書畵墨客)들이나 시객(詩客)들이 명승지를 찾아 즐기고(風流), 불승(佛僧)들이 자연 속에 묻혀 백운(白雲) 청산(靑山)을 마주하고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이(禪定) 다 뜻이 있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풍류를 아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나 명승지에는 으레 자그마한 정자(亭子)를 세우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뜻이 있는 선비들과 끽다(喫茶) 음주(飮酒)로 함께 즐기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또 가재(家財)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집안에 정원과 연지(蓮池)를 만들고 기화이초(奇花異草)를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지지 않도록 하였으며 축대를 쌓고 누대(樓臺)를 만들어 좋은 벗을 청해 다주시화(茶酒詩畵)로 정신적 편안과 육체적 안락을 함께 도모하였으니 이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요,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풍미이다.
이러한 멋의 생활이 차의 생활이요, 이를 얻고자 하는 정신이 차의 정신이다.

3) 차는 절개(節介)다
절개란 선비의 굳은 충절이나 부녀자의 정절(貞節) 또는 예의범절을 말함이다.

차가 선비의 굳은 충절과 같다는 말은 차나무가 상록수로서 겨울의 눈보라를 능히 이겨내고 봄을 맞는 세한(歲寒)의 정신이 있듯이, 선비가 굶주림과 출세의 유혹을 물리치고 절의와 기개를 지키는 꿋꿋한 정신이 서로 같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부녀자의 정절과 같다는 말은 여자가 한 번 출가를 해서 한 남편을 섬기는 것이 차나무가 태어난 땅을 옮겨가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잘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부터 선비 집안에 차가 있었으며 선비의 제례상에는 차를 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여자가 시집을 간다는 것을 {다례(茶禮)}지낸다고 하였는데 이는 혼례식상에 차를 올렸기 때문이며, 혼례를 마친 여인이 시댁 사당에 가서 시댁 조상님들께 폐백을 드리는데, 이것을 {묘견(廟見)}이라고 한다. 이 묘견례 때에 반드시 차를 올렸다. 차를 올리는 까닭은 차나무처럼 옮겨가지 않고 이 집안에 뼈를 묻을 때까지 이 가문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무언의 약조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다례는 신라 시대에는 헌다의식(獻茶儀式)이라고 해서 궁중과 사원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는데 궁중에서는 사직단과 오악삼신(五岳三神)에 제사했으며 사원에서는 불전(佛殿)에 헌다하거나 역대조사를 제사할 때 주로 행했다.

이 의식이 고려 시대에는 진다의식(進茶儀式)으로 발전했는데, 진다의식은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가례(嘉禮) 때에 모두 행했으며 국가의 대소행사에 모두 이 의식을 치렀다. 불전을 향하여 임금이 직접 차를 달여 공덕재를 지내야만 했고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해야만 했다.
이 의식은 복잡하고 장황하여 다방(茶房)이라는 관청부서를 설치해 두고 관리 감독하도록 했으며 이 다방에서 모든 진다의식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려 때 진다의식은 대단히 발달해 왕묘제(王廟祭), 사신권다(使臣權茶), 책봉의식(冊封儀式)과 공주가 시집갈 때 또는 연등회 같은 국가의 모든 행사에 이 의식을 행했다.

그리고 사대부 집안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의식에 다의(茶儀)를 갖추었으며 이 진다의식이 조선시대에서는 다례의식(茶禮儀式)으로 바뀌었다. 다례란 본시 {행다례(行茶禮)}라는 말로써 {차로써 예를 행한다}는 듯이다.

이 다례는 궁중다례와 사원다례 그리고 민간다례로 구별한다. 궁중에서는 사신접대와 다시(茶詩) 그리고 종묘제 때에 상다(尙茶)라는 정3품의 관원을 내시부에 소속시켜 두고 다례를 행하도록 했다. 사원에서는 불전헌다와 조사제 및 대소행사에 다례를 행했으며 민간에서는 관혼상제 때에 모두 다례를 행했으며 원조(元祖), 상원(上元), 삼월(三月), 단오(端午), 유두, 칠석, 중양, 동지, 납월(臘月)과 삭망 때에도 다례를 지냈다.
이 다례는 한글이 창제 반포된 후에 {차례}라고 했으며 명절 등에 행하는 조상제사를 차례하고 하나 이는 변질된 의식이며 본시 다례이다.

4) 기타(其他)
차는 {불기(不器)} 라고 한다. 불기란 공자님 말씀에 {군자는 불기이다}라는 말이 있다. 군자가 그릇(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릇이란 크거나 작거나 둥글거나 모진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만약 군자의 마음이 작고 크고 둥글고 모진 형태, 즉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한계 내에서만 쓰여질 뿐 다르게 이용될 수 없으며 크게 쓰여질 수 없게 된다. 차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와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처럼 군자나 차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된다.

초의선사의 시구에 {고래현성구애다(古來賢聖俱愛茶) 다여군자성무사(茶如君子性無邪)}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옛부터 성현이 다 차를 사랑했는데 차가 군자와 같아서 성품이 사악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덤지에서펌>
출처 : 차마시는 사람들
글쓴이 : 진주목걸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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